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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아시아의 역사-하페즈 알 아사드와 시리아의 독재 통치

서아시아의 역사

by eternalvalue 2025. 3. 5.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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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아시아의 역사- 하페즈 알 아사드: 혼돈 속에서 권력을 쥐다

1970년, 시리아는 격랑의 시대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군사 쿠데타가 연이어 발생하며 정권이 흔들렸고, 정치적 불안정은 국가를 혼돈 속으로 몰아넣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 인물이 무대에 등장합니다. 바로 하페즈 알 아사드. 그는 바트당(Ba'ath Party) 내부 권력 투쟁에서 승리하며 '수정 혁명'을 일으켜 대통령직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단순한 쿠데타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목표는 단순한 권력 장악이 아니라, 시리아를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강력한 국가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아사드는 철저한 현실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알라위파(Alawite) 소수파 출신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다수파인 수니파의 반발을 막고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그는 종파 간 균형을 맞추는 전략을 펼쳤습니다. 군대와 정보기관인 무카바라트(Mukhabarat)를 활용해 반대 세력을 무력화하고, 동시에 바트당을 중심으로 국가 권력을 강화했습니다. 반대파들은 감시당하고, 숙청되었으며, 때때로 그들의 존재조차 역사에서 지워졌습니다.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시리아 정치에서 점점 사라져 갔고, 철권 통치가 시작되었습니다.
서아시아의 역사를 돌아보면, 아사드의 행보는 이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패턴이었습니다.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처럼, 그는 군사적 기반 위에서 장기 집권을 꾀했습니다. 하지만 아사드는 단순한 독재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종파적 갈등을 이용하는 전략적 사고를 갖춘 지도자였으며, 단순한 무력만으로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계산을 통해 정권을 유지해 나갔습니다.

서아시아의 역사-하페즈 알 아사드와 시리아의 독재 통치
서아시아의 역사-하페즈 알 아사드와 시리아의 독재 통치

서아시아의 역사-하마의 복수: 저항과 학살의 역사

독재자는 저항을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종종 잔혹한 방식으로 표출됩니다. 1982년, 시리아 북부 도시 하마에서 무슬림 형제단(Muslim Brotherhood)이 반정부 봉기를 일으키자, 하페즈 알 아사드는 잔혹한 선택을 합니다. 무력으로 모든 반대를 잠재우는 것.
하마는 곧 아사드 정권과 무슬림 형제단 간의 격전지로 변했습니다. 아사드는 동생 리파트 알 아사드를 중심으로 정예군을 파견했고, 도시는 전면적인 포위 공격을 받았습니다. 공습과 포격이 이어졌고, 하마는 불길에 휩싸였습니다. 민간인들은 도망칠 곳이 없었습니다. 공식적으로는 1만 명, 비공식적으로는 4만 명 이상이 학살당했다고 합니다. 거리에는 피가 흘렀고, 건물들은 폐허로 변했습니다.
하마 학살은 단순한 진압 작전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공포의 정치'였습니다. 이후 시리아에서는 어떤 반정부 세력도 감히 정권에 도전하지 못했습니다. 아사드는 하마에서의 승리를 통해 자신의 절대 권력을 대내외에 과시했습니다. 서아시아의 역사에서, 이와 유사한 사례는 무수히 많았습니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시아파 반란을 진압한 것, 이집트의 나세르가 무슬림 형제단을 탄압한 것과 같은 흐름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마 학살은 그중에서도 가장 잔혹한 사례로 남았습니다.
아사드는 철저한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나에게 도전하는 자는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시리아 국민들은 그 메시지를 이해했고, 이후 수십 년 동안 침묵 속에서 살아갔습니다.

서아시아의 역사-중동 패권 경쟁: 강대국 사이에서 살아남기

하페즈 알 아사드는 권력 유지를 위해 외교 무대를 적극 활용했습니다. 그의 첫 번째 전략은 ‘적을 만들어라’였습니다. 그는 시리아를 중동의 패권 경쟁 한가운데로 몰아넣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외교 전략은 이스라엘과의 대립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서아시아에서 가장 큰 적으로 규정하며, 반(反)이스라엘 정서를 이용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했습니다.
레바논 내전(1975~1990)에서도 그는 적극적으로 개입했습니다. 시리아는 레바논을 사실상 보호국처럼 다루며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와 헤즈볼라(Hezbollah) 등 다양한 무장 세력을 지원했습니다. 그는 레바논을 통해 자신만의 ‘전략적 완충지대’를 만들려고 했고, 이를 통해 시리아의 군사적 영향력을 극대화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진정으로 신경 쓴 것은 ‘시아파 축(Shia Crescent)’ 형성이었습니다. 그는 이란과 긴밀한 협력 관계를 구축하며, 시아파 세력과 연대를 강화했습니다. 이 전략은 서아시아에서 이란-사우디아라비아 간 대립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사우디는 시리아를 불편한 눈으로 바라보았고, 시리아는 서아시아에서 고립되지 않기 위해 더욱 공격적인 외교 전략을 펼쳐야 했습니다.
이라크와의 관계도 복잡했습니다. 바트당 출신인 사담 후세인과 하페즈 알 아사드는 같은 이념을 공유했지만, 서로를 라이벌로 여겼습니다. 사담 후세인은 걸프 지역의 패권을 원했고, 아사드는 이를 견제하며 이란과 손을 잡았습니다. 서아시아에서 벌어진 패권 경쟁 속에서, 시리아는 강대국들의 장기판에서 중요한 말이 되었습니다.

서아시아의 역사-아버지의 유산, 그리고 내전의 시작

2000년, 하페즈 알 아사드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아들 바샤르 알 아사드는 서둘러 권력을 이어받았습니다. 이 과정은 시리아를 ‘공화국 왕조(Republic Monarchy)’로 변모시켰습니다. 민주주의 국가임을 표방하면서도, 사실상 왕조처럼 권력을 세습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바샤르 알 아사드는 아버지의 강압적인 통치를 유지하면서도, 개혁적인 이미지도 함께 구축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2011년, ‘아랍의 봄’이라는 거대한 쓰나미가 중동을 덮쳤습니다.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에서 독재 정권이 무너지는 동안, 시리아에서도 반정부 시위가 시작되었습니다. 국민들은 오랜 억압 속에서 분노를 폭발시켰습니다. 하지만 바샤르 알 아사드는 개혁 대신 무력을 선택했습니다. 그의 결정은 내전으로 이어졌고, 시리아는 혼돈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하페즈 알 아사드가 구축한 독재 체제는 단기적으로는 안정적이었지만, 장기적으로는 폭발할 수밖에 없는 불안정한 구조였습니다. 그는 시리아를 강대국으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독재와 탄압의 유산을 남겼습니다. 그의 유산은 바샤르 알 아사드 시대에도 계속되었으며, 결국 시리아는 오랜 내전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서아시아의 역사적 관점에서, 하페즈 알 아사드는 한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강력한 독재자로 군림했지만, 역사의 흐름 속에서 그의 방식이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시대가 변하면서, 그의 유산은 균열을 맞이했고, 결국 시리아는 분열과 전쟁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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