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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아시아의 역사-사우디아라비아의 건국과 와하비즘의 부상

서아시아의 역사

by eternalvalue 2025. 2. 3. 0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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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아시아의 역사-사우디아라비아의 건국 배경과 이븐 사우드의 부상

사우디아라비아의 건국은 한 개인의 업적이라기보다는 18세기부터 이어진 정치적, 종교적 동맹의 결과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은 압둘아지즈 이븐 사우드(1875~1953년)였습니다. 그는 1902년 리야드를 점령하며 사우드 가문의 부활을 선언했고, 이후 반세기에 걸쳐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했습니다. 하지만 사우드 왕조의 부흥은 단순한 군사적 성취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와하비즘(Wahhabism)이라는 강력한 이슬람 종교 이념이 정치적 통합의 핵심 요소로 작용했습니다.

사우드 가문과 와하비즘의 결합은 18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무함마드 이븐 압둘 와하브(1703~1792년)가 창시한 와하비즘은 순수 이슬람을 회복하려는 복고적 운동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이슬람 세계에 만연한 성인 숭배, 무슬림 내의 분파주의, 그리고 이슬람 율법에서 벗어난 관습들을 배격하며, 꾸란과 하디스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근본주의적 접근을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사상은 1744년 사우드 가문의 조상인 무함마드 이븐 사우드와 결합하면서 정치적 세력으로 성장했습니다. 이후 사우드 왕조는 와하비즘을 이념적 기반으로 삼아 세력을 확장해 나갔지만, 19세기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하며 쇠퇴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초 이븐 사우드는 와하비즘을 다시 활용하여 아라비아반도를 통합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이븐 사우드는 영국과 전략적 동맹을 맺으며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우위를 점했습니다. 그는 아라비아반도 내 경쟁 세력인 하심 가문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며 1925년 메카와 메디나를 장악했습니다. 1932년 9월 23일, 그는 정복한 영토를 통합하여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을 공식적으로 선포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와하비즘은 단순한 종교적 이념을 넘어, 새로운 국가의 정치적 정체성과 통치 원리를 형성하는 핵심 요소로 자리 잡았습니다.

서아시아의 역사-사우디아라비아의 건국과 와하비즘의 부상
서아시아의 역사-사우디아라비아의 건국과 와하비즘의 부상

서아시아의 역사-와하비즘의 핵심 사상과 사우디 국가 정체성

와하비즘은 이슬람 근본주의적 해석을 기반으로 한 신앙 체계로,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가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와하비즘의 기본 원칙은 타우히드(Tawhid, 유일신 신앙의 절대성)를 강조하며, 이를 훼손하는 모든 행위를 배격하는 것이었습니다. 무함마드 이븐 압둘 와하브는 당시 무슬림들이 성인의 무덤을 방문하고, 성지 순례 중 특정 장소에서 기도하는 행위 등을 이슬람의 타락한 모습으로 간주하며 이러한 관습을 철저히 배격했습니다. 이는 기존의 수피즘(Sufism)과 시아파(Shia) 이슬람을 강하게 반대하는 입장과 연결되었습니다.

이븐 사우드는 와하비즘을 단순한 종교 개혁 운동이 아니라 국가 건설의 핵심 이념으로 채택했습니다. 그 결과 사우디아라비아는 이슬람 샤리아(Sharia, 이슬람법)에 기반한 국가로 조직되었으며, 정부와 종교 기관이 밀접하게 연결되었습니다. 특히, 1920년대와 1930년대에 걸쳐 이븐 사우드는 와하비즘의 충실한 지지자들로 구성된 이흐완(Ikhwan, 형제단)을 활용하여 아라비아반도의 다양한 부족들을 통제했습니다. 이흐완은 와하비즘의 원칙을 강력히 지지하며 전통적인 아랍 부족 사회를 개혁하고, 이슬람적 규범을 강화하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사우디아라비아가 현대적인 국가 체제를 갖추는 과정에서 독특한 특징을 형성했습니다. 예를 들어, 이란이 시아파 신정국가로 발전한 것과 달리, 사우디아라비아는 수니파 이슬람의 엄격한 형태를 국가 운영의 기반으로 삼았습니다. 또한, 국왕은 "이슬람의 수호자(하디무 알하람라인)"라는 칭호를 사용하며, 메카와 메디나의 관리자로서 이슬람 세계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서아시아의 역사-석유 발견과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제적 위상 변화

1938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대규모 석유가 발견되면서 국가의 경제적, 지정학적 위상은 급격히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븐 사우드는 미국과 협력하여 석유 산업을 발전시켰으며, 이는 사우디 경제 구조를 완전히 변화시켰습니다. 1945년, 이븐 사우드는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과 회담을 가지며 미국-사우디 동맹의 기초를 마련했습니다.

석유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와하비즘을 국제적으로 확산하는 데 중요한 재원이 되었습니다. 20세기 후반부터 사우디 정부는 이슬람 세계 곳곳에 와하비즘 교육기관과 모스크를 건설하며 이념을 확산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서방 세계와의 갈등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서구에서는 와하비즘이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들의 이념적 기반이 된다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서아시아의 역사-현대 사우디아라비아와 와하비즘의 도전

21세기 들어 사우디아라비아는 경제 개혁과 정치적 변화의 흐름 속에서 와하비즘과 국가 운영의 균형을 맞추려 하고 있습니다. 2017년 무함마드 빈 살만(MBS) 왕세자가 등장하며, 그는 사회 개혁과 경제 다변화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특히 여성 운전 허용, 관광 산업 육성 등은 전통적인 와하비즘 체제에서는 불가능했던 변화였습니다.

하지만 와하비즘의 영향력은 여전히 강력합니다. 사우디의 법률 체계는 여전히 이슬람 샤리아를 기반으로 운영되며, 종교 경찰(Mutaween)이 존재하는 등 보수적인 사회 구조가 유지되고 있습니다. 또한, 사우디는 이란과의 종파적 갈등 속에서 여전히 수니파 세계의 지도자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건국과 와하비즘의 부상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오늘날 중동의 정치와 국제 관계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사우디는 이슬람의 중심지로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와하비즘의 존재는 사우디의 정치·사회 구조뿐만 아니라 전 세계 이슬람 사회에도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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