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1939~1945년)은 유럽과 아시아에서 주로 전개되었지만, 서아시아 역시 주요 전쟁 지역으로 포함되었습니다. 이 지역은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으며,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중간 지대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석유 자원이 풍부하여 연합국(영국, 소련, 미국)과 추축국(독일, 이탈리아)의 주요 관심 대상이 되었습니다. 당시 세계 경제에서 석유의 중요성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었으며, 독일은 석유 확보를 위해 서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고, 영국과 소련은 이를 저지하려 했습니다.
서아시아의 여러 국가는 전쟁 전부터 서방 열강의 영향 아래 있었습니다. 이란과 이라크는 영국과 독일의 외교적 경쟁이 치열하게 펼쳐진 지역이었으며, 특히 이란은 석유 자원과 전략적 위치로 인해 전쟁 중 주요 무대가 되었습니다. 또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유대인과 아랍인 간의 갈등이 깊어지고 있었고, 이는 영국의 통치력 약화와 함께 더욱 복잡한 문제로 부각되었습니다. 독일과 영국은 각각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서아시아의 정세를 조정하려 했고, 이는 전쟁 중 이 지역에서 벌어진 다양한 군사 작전과 정치적 변화로 이어졌습니다.
독일의 나치 정권(1933~1945년)은 서아시아에서 반(反)영국 정서를 이용하여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습니다. 히틀러와 나치는 특히 이라크, 팔레스타인, 이집트 등에서 반영국 운동을 지원하며 영국의 중동 지배를 약화시키려 했습니다. 독일은 이라크의 민족주의자들과 접촉하며 친독일 성향의 정부를 수립하려 했고, 그 결과 1941년 이라크에서 친독일 쿠데타가 발생했습니다.
이라크의 라시드 알리 알-카일라니(Rashid Ali al-Gaylani)가 주도한 이 쿠데타는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일과 협력하려는 시도였습니다. 라시드 알리는 독일과 이탈리아에 군사 지원을 요청했으며, 독일은 이에 호응하여 아랍 민족주의 세력과 연계를 강화했습니다. 하지만 영국은 이를 좌시하지 않았고, 1941년 영국군은 이라크를 재침공하여 쿠데타를 진압했습니다. 이에 따라 라시드 알리는 독일로 망명했으며, 독일의 서아시아 개입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한편, 독일은 팔레스타인에서도 반영국 세력을 지원하려 했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에서는 영국의 지배하에 유대인 이주 문제가 심화되고 있었으며, 아랍인들은 이에 반발하고 있었습니다. 나치는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팔레스타인의 아랍 민족주의자들과 접촉했고, 특히 예루살렘의 대무프티 하즈 아민 알-후세이니(Haj Amin al-Husseini)와 협력했습니다. 그는 독일을 방문하여 히틀러와 회담을 가졌으며, 독일과 협력하여 영국과 시온주의자들에 맞서겠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하지만 독일은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패배하며 실질적인 지원을 제공할 수 없었고, 결국 서아시아에서의 영향력 확대는 제한적이었습니다.
독일이 서아시아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시도를 하자, 영국과 소련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적극 개입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1941년 영국과 소련의 이란 점령이었습니다. 당시 이란은 공식적으로 중립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레자 샤 팔레비(재위 1925~1941년)는 독일과 경제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독일은 이란과 무역을 확대하며 석유 자원을 확보하려 했고, 이는 연합국에게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1941년 8월, 영국과 소련은 공동으로 이란을 침공했습니다. 영국군은 남쪽에서, 소련군은 북쪽에서 진군하여 이란을 빠르게 점령했고, 레자 샤는 강제로 퇴위당했습니다. 이후 그의 아들 모하마드 레자 팔레비가 왕위에 오르며 영국과 소련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란은 전쟁 기간 동안 연합군의 군수 물자 수송 경로인 "페르시아 회랑(Persian Corridor)"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이는 서방이 독일과 싸우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습니다.
영국은 또한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에서 독일의 위협을 차단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독일의 에르빈 롬멜(Erwin Rommel) 장군이 이끄는 아프리카 군단은 북아프리카에서 영국과 격돌했으며, 1942년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영국군이 승리하면서 독일의 중동 진출 가능성이 사실상 사라졌습니다. 이 전투 이후, 영국은 서아시아에서의 군사적 우위를 확고히 했고, 독일은 이 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기회를 상실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서아시아는 정치적·사회적으로 큰 변화를 겪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가 전후 경제적·군사적 부담으로 인해 서아시아에서의 식민 통치를 지속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으며, 이로 인해 여러 지역에서 독립운동이 활성화되었습니다.
특히, 전쟁 이후 이란, 이라크, 시리아, 팔레스타인 등의 지역에서 민족주의 운동이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1947년, 영국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유엔에 넘겼으며, 결국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되면서 중동 지역은 더욱 복잡한 분쟁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또한, 전후 서아시아에서는 미국과 소련 간의 냉전이 본격화되었으며, 서방과 소련이 각자의 영향력을 확대하려 하면서 서아시아는 새로운 국제 질서 속에서 중요한 지역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한편, 전쟁 동안 서방의 경제적 개입이 확대되면서 서아시아의 석유 산업은 더욱 중요해졌습니다. 미국과 영국은 석유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 등의 국가들과 긴밀한 협력을 맺었으며, 이는 서구 기업들의 중동 석유 시장 장악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란에서는 이러한 서구의 개입에 대한 반발이 커졌으며, 결국 1951년 모하마드 모사데그 총리가 석유 국유화를 단행하며 서방과 갈등을 빚게 되었습니다.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은 서아시아에서 영국과 독일의 경쟁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전쟁 후에는 영국이 쇠퇴하고 미국과 소련이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는 이후 서아시아에서의 냉전 구도 형성과 정치적 불안정성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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